대한불교 조계종 대각사

3.1 독립운동의 성지 대각사 大覺寺

대각사 소개
3·1독립운동의 성지 大覺寺

대각사는 민족해방운동을 위하여 백용성스님이 세운 절이다. 용성조사는 48세부터 77세 열반에 드실 때까지(1911년~1940년) 빼앗긴 조선독립을 위하여 온몸을 던졌다할 수 있다. 그리고 열반하실 때까지 민중의 깨우침을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하였다. 일제치하에서 조선독립과 민족의 자각과 전법을 목적으로 전체를 다 던지셨다.

용성조사는 조선독립과 민족해방을 위하여 매진할 것을 스스로 다짐하고 서울 사동에 서 선불교 교화불사를 맡아 봉익동 1번지 일대를 사들여 독립운동의 성지 대각사를 세우고, 백범 김구를 만나고 1912년 김구 선생의 나이는 37세 때이며 용성조사는 49세이다. 1896년 김구선생은 해주에서 대한독립운동을 하다가 투옥되어 인천감옥으로 이관되고 거기서 탈옥한다. 그리고 대신 부모가 투옥되고 백범은 삼남으로 도피, 그해 늦가을 마곡사(麻谷寺)에서 스님이 되고 원종(圓宗)이란 법명을 얻고 3년을 수행하였다. 금강산, 평양 대보산, 영천암 등에 기거하면서 수행하다가 다시 환속하게 된다. 그 후 김구 원종은 서울에 오면 언제든지 용성조사가 있는 대각사에 머무르면서 용성조사한테서 가르침을 받아 민족을 살릴 대원을 세우고 보현행원을 실천할 행자가 되기로 스스로 다짐하였다. 후에 김구는 상해로 망명하게 되며 용성조사는 김구에게 독립자금을 전달하곤 하였다. (김구 환영대회 대각사 사진 및 기사 참고) 김구선생은 용성조사의 1940년 열반 소식을 듣고 상해에서 통곡하였다고 한다. 민족을 살릴 큰 어른 또 한 분 돌아가셨다고 슬퍼하였 다고 한다. 원종(圓宗) 김구선생은 용성조사, 만해선사 등 많은 지사들과 거사할 것을 약속하였으나 김구는 당시 해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기로 하였다.

용성조사는 1919년 3월 1일에는 민족대표 33인중 불교대표로 참여하여 2년여 간의 서 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어 갖은 옥고를 다 치렀다. 출소 후 용성조사께서는 경전 번역과 전 법 그리고 은밀히 독립운동을 하였다. 그 가운데 경남 함안의 화과원(華園) 운영, 만주 용정의 27만여 평의 농지를 구입하여 화과원을 운영, 잉여 농산물은 모두 독립자금과 독 립군의 식량으로 썼다고 한다. 그런 일로 후일 1931년에는 대각사가 일본 조선총독부에 재산 몰수를 당하게 되었다. 일본의 조선박해와 압제에 굴하지 않고 조선해방운동을 하 였다. 그러나 용성조사는 끝내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40년 음력 2월 24일 대각사 에서 열반하시었다. 다비식은 일본경찰의 철저한 방해와 수색, 검열 등으로 제자 몇 분 만이 조사의 다비식을 조촐하게 치렀으며 용성조사의 사리탑은 해인사 용탑선원 산록에 세워졌다. 이곳 대각사는 용성조사의 전법의 땅이며, 열반의 땅이고, 깨우침의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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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각사 전화번호 : 02-744-45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