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스님들과 함께 한 ‘용성 조사 탄신 16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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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80회 작성일 23-10-10 10:30본문
어른 스님들과 함께 한 ‘용성 조사 탄신 160주년’
종원 / 대각사 주지
‘여행은 눈 뜨고 꾸는 꿈이다.’라고 누군가 얘기한 적이 있다. 그런 꿈을 꾸었다. 그것도 은사 스님과 은사 스님 연배의 어른 스님들과의 일주일에 가까운 여정은 실로 행복한 외출이었다. 대각회 분원장 워크샵을 겸한 불교문화탐방은 용성 조사 탄신 160주년을 기념하여 계획한 특별한 해외 나들이었다.
마치 시자나 다름없는 자격으로 어른 스님들 곁을 지키며 보낸 엿새 동안의 시간은 꿈길을 걷는 것만 같았다. 일생을 수좌로 살아오신 혜국 큰스님, 일오 큰스님, 그리고 백담사 선원장 영진 스님 등 많은 어른 스님들은 나와 같은 젊은 출가 수행자들에게는 언제나 귀감이 돼 주고 계신 이 땅의 선객들이시다. 그 밖에 몇몇 소임 스님들과 비구니 스님들 역시 그곳에서는 탐방 내내 시자였으나 즐거움은 곱절에 달하는 모습이었다.
불교 유적이 가득한 타슈켄트는 잘 보존된 보물창고 안을 들여다보는 것만 같았다. 우즈베키스탄을 대표하는 테레미즈 부처님상, 19세기 아프카니스탄의 불감(佛龕), 부처님 일대기의 장면들 등 소중하기만 한 불교 유산을 원 없이 보고 느낀 여정이었다. 더욱이 어른 스님들과 일정을 소화하는 나에게 스님들은 유형의 불교 유산을 접하는 일만큼 소중한 살아 숨 쉬는 불교 유산과 같이 한다는 느낌이었다. 치열하게 정진하신 지나온 시간들과 여전히 정진으로 일관하고 계신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 시도 허투루 살지 않으신 스님들의 지난 시간들이 불교 유산이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함께 공양하고, 같이 걸으며 들은 스님들의 법담은 시간마다 주어지는 소참법문이었고 종종 전체에게 공지를 하는 순간에는 마치 야단법석이 따로 이지 않았다. 승랍과 그 많은 연륜은 나와 같은 젊은 출가자를 살짝 긴장하게 했지만 나쁘지 않은 긴장이었고, 몇 분의 어른 스님에게서는 뚝뚝 떨어지는 자비가 그렇게도 여유로워 보였다. 깊어지고 깊어져 푹 익은 수행자의 기품 그대로였다. 환희심을 소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행복이었다.
그런가 하면, 스님들이 필요에 의해 젊은 후학을 부르는 소리는 속가의 부모님이 사랑을 듬뿍 담아 부르는 소리와 다를 게 없었고 몇 걸음 등 뒤에서 들려오던 칭찬은 송구하기도 했지만 미소를 짓게 하는 기분 좋은 격려이기도 했다. 칭찬을 듣고 자라나는 것들이 생명 있는 것들이고 사람이기도 하겠으나 역시 기분 좋은 영약을 흡입한 느낌이었다. 감사한 마음이 그 높은 타슈켄트의 하늘에 일렁이는 듯했다.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함께 여행을 떠나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그 여정에서도 비켜가지 않았다. 무엇이든 나누고자 하는 스님이 있는가 하면, 유유자적 혼자 느끼고 보는 스님이 있고 시자를 대동해 오셨음에도 웬만한 것은 당신 스스로 하려 하는 어른 스님이 계셨다. 또한 평소 선방을 지키며 근엄함을 보이시던 수좌 스님께서는 새로운 것, 처음 접하는 불상에 어린 아이처럼의 해맑은 표정으로 이전의 이미지를 탈바꿈한 듯 생소한 모습도 연출하셨다. 내면에 숨죽이고 있던 천진한 일면이 너무도 반가웠다.
그뿐이 아니다. 그 이역만리까지 나와 있음에도 새벽예불을 빠트리지 않는 어른 스님들의 여여하신 출가 수행자로서의 모습은 실로 겸허해지고 낮아지는 장면들로 ‘나’를 다시금 점검하게 했다.
‘저런 저력으로 이곳까지 오셨겠구나.’라는 생각에 존경의 마음이 누그러들지 않았다. 포교 현장을 지키며 제법 소신 있게 살아왔다고, 살아가고 있다고 자신한 스스로가 낯 뜨거운 시간이었다. 일행 스님들 중 아무도 모르겠지만 난 스님들의 그림자를 따라 걸으며 마치 민낯을 보인 듯 부끄러워졌다. 나만이 아는 참회의 시간이었다.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차분히 나를 관조한다. 부단 없이 노력하되, 호언장담은 아껴야 한다. 어디에도 부끄럽지 않아야 하지만 당당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더 연륜이 보태어진다 할지라도 아낌없이 수행하고 포교하며 스스로를 탁마할 수 있어야 한다.
활자화 하지 못하는 감사함은 두고두고 다시 꺼내어 내면을 일깨우는 일에 써야 한다. 그리하여 내가 어른 스님들의 세수가 되어서도 세상을 이익 되게 하는 출가승으로 한국불교의 일원이 되어 살아가야만 한다. 그것이 부처님 ‘밥값’을 하는 최소한의 도리이다.
나의 자리로 돌아와 일상을 꾸리고 있다. 살아온 30여 년 보다, 살아갈 30년, 50년이 훨씬 더 승가다운 삶이기를 소원한다. 후회가 적은 삶을 살아가고 싶다. 눈 뜨고 꾸는 꿈도, 의식 속의 단단한 꿈도 이미 거머쥔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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