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대각사, 범어사 율주 수불스님 초청 특별법회 봉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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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07회 작성일 24-09-25 10:05본문
9월22일, ‘부처님 깨달음과 선수행’ 주제로 법문 설해
“불자라면 마땅히 견성(見性)할 수 있는 수행해야”
“불자라면 마땅히 견성(見性)할 수 있는 수행을 해야 한다.”
한국불교의 전통수행법인 간화선 수행을 국내외에 선양하고 있는 안국선원장이자 금정총림 범어사 율주인 수불스님(불교신문 사장)이 용성대종사가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삼아 활동한 대각사에서 ‘부처님의 깨달음과 선수행’이라는 주제로 법문했다.
서울 대각사(주지 종원스님)는 9월22일 대각사 3층 대웅전 법당인 대각성전에 ‘안국선원 수불스님 초청 특별법회’를 봉행했다. 이날 법회에는 대각사 신도와 안국선원 신도 등 사부대중 200여 명이 동참해 한국불교에서 고조되고 있는 간화선 수행에 대해 수불스님의 안목(眼目)을 선보였다.
법단에 오른 수불스님은 “불자라면 마땅히 근본 마음의 당처(當處, 마땅한 자리)를 깨닫는 수행을 해야 한다”며 “기왕이면 견성을 해야 하고 견성이 목적이니 견성할 수 있는 수행을 해야지 수행만 하다가 끝나버리면 안된다”고 법좌를 폈다.
<육조단경>의 육조스님과 <금경경>의 수보리 존자도 두번 깨달았음을 강조한 스님은 “육조스님이 두 번 깨달은 것은 나무꾼으로 있을 때 도송(오도게송)을 하고 오조스님을 찾아가 방앗간에서 방아 찧고 다시 오조스님 찾는 입장에서 <금강경>을 읽어주는데 훤희 깨닫고 노래를 불렀고, 장로 수보리 (처음에는) 아라한과를 증득(證得)했고 그 후 부처님께 여쭙고 상이 깨지면서 법안(法眼)이 열렸다”고 했다. 수불스님은 육조스님과 수보리 존자의 깨달음에 대해 “앞의(처음) 돈오(頓悟)는 점수(漸修)적 돈오요, 뒤의 돈오는 돈수(頓修)적 돈오”라고 강조했다.
이어 스님은 “부처님 가르침에는 비밀이 없어 항상 공개돼 있다”며 “지혜의 눈을 뜨지 못하고 어리석음에 뒤범벅이 되어가지고 정신없이 살다보니 근본을 놓치고 자꾸 허망한데 끄달려서 살다보면 범부의 신세를 모면하지 못한다”고 설파했다.
‘한 생각 돌이켜서 본원(本原)에 들어가서 진실을 눈뜨면 밝은 곳을 볼 수 있다’고 강조한 수불스님은 “대승계(대승불교)는 베풀고 나누는 게 계를 지키는 것”이라며 “지혜의 눈을 뜨고 어려운 사람, 참 자기보다 못한 사람, 또 잘난 사람 있으면 감사하고 더 잘난 사람 있어 남을 이익되게 하면 고마운 일”이라며 자비보살 실천행을 강조했다.
수불스님은 “불교는 대자대비하지만 불법은 진리 이외에는 용납하지 않아 무자비하다”며 “불교는 불법을 깨닫기 위한 가치(방편)를 지니고 있기에 불교를 만나 불법으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를 절에 나와 얻게 되는 것”이라고 설파했다.
대각사 수불스님 초청 특별법회에서 의식을 진행하고 있다.
수불스님 법문 요약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서 일주일 만에 깨닫고 난 뒤에 최초로 설하신 가르침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화엄경>입니다. <화엄경>을 설했는데 아무도 이해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려고 하는 생각을 일으키셨다고 합니다. 다 방편으로 그렇게 하셨다고 하지만 그때 범천이 부처님 앞에 모습을 나퉈서 “과거 전생에 저희들한테 중생구제 하시겠다고 한 약속을 잊으셨습니까”라고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왜 잊으셨겠어요. 중생들로 하여금 다시 환기시키는 그런 인연을 열어 보이신 것이지요.
그러니 부처님이 가납(嘉納, 권하는 말을 기꺼이 받아들이다)을 하고 중생근기에 맞는 가르침을 설한 게 <아함경>입니다. <아함경> 속에는 화엄(사상)이 있고, 화엄 속에는 아함(사상)이 있어요. 이게 원융(圓融, 원만하게 화합해 녹아들다)하다는 말입니다. <아함경> 안에도 화엄의 도리가 있다는 것은 공부한 사람들은 이해합니다. 따로따로의 독립된 관점이 있지만 그렇지 않는 것입니다.(모두가 회통하고 있다는 의미)
화엄은 21일간 설했지만 아함은 12년이나 설했습니다. 그리고 방등시 8년(方等時, 부처님이 <유마경>, <능가경> 등의 여러 방등(方等)경전을 설한 시기)과 공의 도리를 설한 반야시(般若時) 21년, 법화열반시 8년을 합해 49년을 설법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부처님이 깨닫고 난 뒤 45년을 살다 가셨는데 왜 49년이냐 할 겁니다. 깨닫기 난 이후의 이야기는 또다른 차원이지만 깨닫기 전에도 수행자로서 가치를 지닌 여정을 걸으셨으니, 많은 분들에게 공부하는 길을 안내하는 시간을 가지셨으니 저희들은 그렇게 보는 거지요.
그러면서 아함에서 인과, 사성제, 팔정도, 12연기 등 유의법(有爲法)이랄까 형상(形相)과 관계되는 상을 이야기했고, 방등시에서 공을 이야기했고, 반야에 들어서는 근본실상의 깨달음을 이야기했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닫고 난 뒤 5비구 중에 교진여가 가장 먼저 깨달았는데 깨달으신 후 ‘누구를 깨닫게 해 줄까’하고 생각했어요. 부처님을 저버리고 떠나간 간 5비구가 생각났어요. 부처님이 타락했다고 떠나가서 바라나시에서 머물면서 자기들 나름대로 공부하고 있었거든요.
부처님이 부다가야에서 바라나시까지 걸어갑니다. 거기서 부처님이 5비구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니까 그 사람들이 모두 다 외면하고 “모른 척 하자” 이랬는데 급기야 부처님의 거룩하신 모습을 보고 물도 떠 올리고 하는 입장을 보였다고 해요. 그러면서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야기했는데 교진여가 제일 먼저 깨달았어요. 5비구 가운데 다섯 분이 다 깨달았는데 그때 부처님께서 감탄하시면서 “교진여가 깨달았다. 교진여가 깨달았다”고 해요. 부처님께서 남을 깨닫게 해 준 시초의 일이지만 자신이 깨달은 것 못지않게 상대방을 깨닫게 해 준 것에 대해 감격을 합니다. 그게 시작이 되어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시작된 것입니다.
불자라면 마땅히 근본 마음의 당처(當處, 마땅한 자리)를 깨닫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견성(見性)할 수 있는 수행을 해야지 수행만 하다가 끝나버리면 안됩니다. 견성을 못하면 억울해서 어떻합니까. 기왕이면 견성을 해야 하고 견성이 목적인데 견성이 무엇인지 이해는 했는데 체험을 못했으니 “견성을 하는 수행방법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하고 물어볼 곳도 없고 누가 이야기 해 준 적도 없어요. 그냥 절에만 쫓아다니기 바빴지요.
<육조단경>에 육조스님이 두 번 깨달았어요. <금경경>의 수보리도 두 번 깨달았어요. 그 말에는 일맥상통하는 게 있다는 말입니다. 육조스님이 두 번 깨달은 것은 나무꾼으로 있을 때 도송(오도게송)을 하고 오조스님을 찾아가 방앗간에서 방아 찧고 다시 오조스님 찾는 입장에서 <금강경>을 읽어주는데 훤희 깨닫고 노래를 부릅니다. 노래하듯이 기분이 업(UP)된 내용이 <육조단경>에 나와요.
앞의 돈오(頓悟)는 점수(漸修)적 돈오요, 뒤의 돈오는 돈수(頓修)적 돈오라는 이야기입니다. 수보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장로 수보리였을 때 한번 깨달았어요. 아라한과를 증득(證得)했다는 말입니다. 아라한과를 증득하지 못하면 장로가 못되는 겁니다. 그러고 난 뒤 부처님께 여쭙고 상이 깨지면서 법안(法眼)이 열렸어요. 불법(佛法)을 이야기할 때는 “불법 아닌 게 어디 있냐”하는 게 아닙니다.
“일체 불법이 부처님 눈이지, 부처님 눈 아닌 게 어디 있어”라고 우리도 옛날에 착각했다니까요. 내가 내 눈으로 보냐, 안 보냐 할 때 내가 내 눈으로 보지 않고, 보여지는 게 어디 있겠어요. 내 눈이 보여져야 보여지는 거지. 자기 눈으로 못보면 앞의 것이 안보여요. 그건 봉사(盲人)지요. 봉사가 보는 것은 방법이 달라요. 눈으로 보는 것은 색상으로 구분하지만 봉사가 보는 것은 더듬거려요. 그것도 보는 겁니다. 살아 있으니까 그렇게 하는 거지, 죽은 송장이 그러는 거 봤어요. 그러니까 송장을 끌고 다니는 ‘이 뭣꼬?’라고 묻는 겁니다.(화두 제시)
나를 누가 움직이게 하는냐? 그게 말로 하자면 마음입니다. 이런 뜻인데 “마음입니다”라고 하면 업이 다 녹아야 하는데 업이 녹기는커녕 ‘마음’이라는 알음알이만 하나 더 배웠으니 그거 말짱 헛일이죠. 마음을 깨닫는 순간 일념돈탕진(一念頓蕩盡)이라고 몸 안에 있던 나쁜 악습과 악재들이 싹 뽑혀 한꺼번에 몰록 빠져나가야 할 겁니다. 그런 인연을 맛봐야 하는데 우리는 도대체 어디서 맛볼 수가 있을까요? 그냥 선방 문고리만 잡아도 삼악도를 면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 믿고 지금까지 해(살아)왔습니다.
지금부터는 자기 것을 해 보세요. 그때는 그때 일이고 지금은 지금의 일이고, 지금이 더 좋으면 더 좋은 쪽으로 가야지요. 좋은 지 안 좋은 지 구분도 못하는 애매모호한 그런 모습으로 불교를 믿어서 되겠습니까? 불교는 명확한 건데 말입니다.
종교 사상 이념 윤리 이것이 질서예요. 일반(세상)은 사회사상, 사회이념 사회윤리 이게 질서예요. 수레의 양 바퀴와 같다는 말입니다.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죠. 정신과 물질이 둘이 아니라고 했으니, 정신도 물질도 뭔가를 위해서 만들어진 거지요. 정신이 물질을 만드는 게 아닙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정신이 물질을 만든다고 착각을 해요. 그게 아닙니다. 그렇게 느껴질 뿐입니다. 그게 진실인지 아닌지를 규명을 못해요. 그것이 거짓인데도 불구하구요.
정신도 뭔가를 위해 만들어지고, 물질도 뭔가를 위해 만들어지는 겁니다. 동시다발적으로 말이지요. 그런데 그런 까닭을 아무도 모른단 말입니다. 눈감고 사니까요. 그러니까 지혜로운 눈을 통해서 깨달아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야지 눈에 보이는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또다른 세계까지도 소화할 수 있는 지혜로운 눈이 열리는 거지 안 그러면 어떻게 이해를 하겠어요. 또 이런 말이 있는 줄 알아도 소화할 수 있겠어요? 스님은 이해를 하고 그런 말씀 하는 거요? 우리를 기만하는 거요?라고 하면 할 말이 없는 걸로 하겠어요. ‘아는 만큼 떠들고 마는 거니까 그렇게 알아요’라든가 ‘피차간에 모르는 거 아닌가요?’라는 어리석음을 부처님 제자가 범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부처님(가르침)은 비밀이 없어요. 항상 공개됐어요. 당신이 몰라서 비밀이지 알면은 비밀이 어디 있겠어요. 천하에 다 공개됐어요. 지혜의 눈을 뜨지 못하고 어리석음에 뒤범벅이 되어가지고 정신없이 살다보니 근본을 놓쳤단 말입니다. 본질을 놓치고 자꾸 허망한데 끄달려서 살다보니 그게 범부가 된 거지요. 한 생각 돌이켜서 본원(本原)에 들어가서 진실을 눈뜨면 밝은 곳을 보는 건데 지혜로운 눈을 떠야지요. 그러면 어떻게하면 지혜로운 눈을 뜰 수가 있을까요? 이거 믿을려고 불교 믿어야지요.
지혜로운 눈을 뜨기 위해 불교를 믿어야 한단 말입니다. 믿다 보면 지혜의 눈이 떠지겠지뭐 하는 건 불자가 아닙니다. 한심합니다. 그러니까 두드려 맞을 각오하고 이 말을 합니다. 많은 스님들이 공감할 지, 아니면 너만 알고 그런 말 한다고 할 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말 하려고 공부했고 아는 만큼 남들하고 나누려 했지요. 이게 계 잘 지키는 겁니다.
소승계는 지키는 게 계입니다. 범하지 않고, 꼼짝하지 말고, 못 바꾸고 하지마라는 것을 하면 안됩니다. 대승계는 안 그래요. 베풀고 나누는 게 지키는 겁니다. 지혜의 눈을 뜨고 어려운 사람, 참 자기보다 못한 사람, 또 잘난 사람 있으면 감사하고요. 더 잘난 사람 있어 남을 이익되게 하면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위 아래 없이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지, 시기 질투하고 이런 어리석은 마음을 가지고 공부하면 허망하단 말입니다.
꿈에서 깨야 합니다. 꿈이 뭔지 진실이 어떤 것인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꿈속의 삶을 벗어나서 진실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꿈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꿈꾸고 있는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지혜로운 눈을 떠야 합니다. 어떻게 지혜로운 눈을 떠야 하는 지는 육조스님이 분명하게 보여 주었어요.
도망가다가 혜명존자가 쫓아왔을 때 바위 위에 가사와 발우를 올려놓고 가져가라 했어요. 그때 혜명존자가 잡으려고 하니까 바위에서 안떨어졌다고 책에서 이야기 하죠. 그런게 아니죠. 무슨 가사 발우에 신통력이 있다고 붙어서 안떨어졌겠어요. 이게 부처님 때부터 내려 온 신물(神物)인데 감히 범부가 죄많은 사람이 잡을 수 있겠어요? 눈 앞에 딱 보여봐요. 뺏을려고 쫓아온 것은 사실인데 자기도 양심이 있는데 그걸 덜컥 ‘내것이다’라고 받겠어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겠지요. 오조스님이 육조스님에게 준 까닭이 있을 거라 생각했겠지요. 자신도 오조스님 제자지만요. 변화가 있을 거 아닙니까. 안 봤을 때와 봤을 때 말입니다. 또 안 봤을 때 다른 생각을 가지고 쫓아왔을지도 모르죠. 그러니까 내가 가사 발우가 빛나서 찾아온 게 아니고 ‘행자님, 모습을 나투셔서 부디 나를 깨달음으로 인도하소서’라고 한 게 아니겠어요. 그게 진실된 말인 줄 알고 육조스님이 바위틈에서 나와 가지고 “선(善)도 생각하지 않고, 악도 생각하지 않았을 때 너의 본래면목이 무엇인고?” 그 말에 깨달았다는 말 아닙니까?
공부는 깨달음을 통해서 거듭나기 위해서 수행하는 시간을 보내는 거고, 불교를 믿으라고 하는 겁니다. 불교는 깨달음을 얻기 위한 하나의 수단입니다. 또 깨달음을 통해서 진실이 규명됐으면 그 깨달음도 버리라고 했어요. 깨달음이라는 게 굉장한 것 같지만 그것도 내려놔야 합니다. 그럴 때 더 큰 깨달음을 얻는 겁니다. 마음 비우고 내려놔라 했는데 계속 깨달음을 붙들고 ‘더 큰 깨달음, 더 큰 깨달음’ 이래서는 그게 욕심이지 될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깨달은 사람들은 자기를 버리고 있어서 갑질을 잘 안합니다. 중생구제하려는 마음만 있습니다. 짐짓 방편으로 할려는 지는 모릅니다.
처음부터 우리는 깨달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나오지는 않았어요. 범부중생으로 이 세상에 와서 어렵게 부처님 법 만났다고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라고 하지 않습니까. 불교는 대자대비하지만 불법은 무자비해요. 진리 이외에는 용납을 하지 않습니다.
불교는 바다와 같아 더럽든 깨끗하든 온갖 강물을 다 받아들여요. 다 이해하고 용서하고 베풀고 나눠요. 불법은 진리 이외에 용납을 하지 않고 다 쳐버려요. 양면성을 지니고 있어요. 그래도 큰 가르침이란 말입니다. 불교는 불법을 깨닫기 위한 가치(방편)이지요. 불교를 만나 불법으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셈이지요. 그러니까 대각사에 다녀야 한단 말입니다.(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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