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나라를 빼앗긴 통한을 안고 민중의 깨우침과 조선인들의 안녕을 위해 서울 심장부 종로 한복판에 창건된 대각사가 불교중흥 전법포교의 깃발을 꽂고 새롭게 발돋움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1911년 독립운동가로 활약한 백용성스님(1864~1940)이 민족해방운동을 표방하고 조선독립과 민족의 자각, 조선불교중흥을 위해 창건한 대각사는 보현행원을 실천하는 전법도량으로, 특히나 1980~90년대에는 명성이 자자했다. 수도권 출신 정재계 불자 인사들 다수는 대각사 불교학생회 출신이고 1980년대 대불련 학생들은 대각사를 제집 드나들 듯 오가며 수행공덕을 쌓으면서 전법포교에 발벗고 나섰다. 성철스님, 운문스님, 광덕스님, 도문스님 등 당대 기라성같은 선지식들이 대각사 법상에 자주 올랐고, 법회가 열리는 날이면 대각사 법당 안팎에 구름처럼 운집한 인파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2000년 들어 대각사는 옛 명성만 남긴 채 사람들의 인식에서 멀어져 갔다. 조계사는 잘 알지만 대각사는 존재조차 모르는 젊은 세대들도 많다. 대각사는 역사에만 등장하는 잊혀진 도량이 돼버렸다. 매년 3월과 6월 용성스님의 열반과 탄신다례재가 특별한 사찰행사의 전부였다.
대각사가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고 생기있는 전법도량으로 일신한 계기는 한 스님의 간절한 원력에서 시작됐다. 2020년 대각사 새 주지 종원스님이 부임하면서다. 코로나가 창궐하기 시작한 절망의 나락에서 종원스님은 희망의 날개짓을 폈다. 종원스님이 주지로 오자마자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이른바 ‘엘리베이터 불사’.
옛날식 건축물이어서 층고가 높아 가파른 계단으로 3층 법당을 오르내리려면 관절이 약한 노보살들에겐 곤욕이었다. 종원스님은 망설임없이 주지실 방사를 포기하고 건물 일부를 개축해서 특유의 신중함과 신속함으로 안전하고 쾌적한 승강기를 설치했다. 대각사 부처님을 모시고 평생을 산 노보살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너무 좋아서 눈물을 짓기도 했다. ‘엘리베이터 불사’가 원만회향한 뒤, 대각사는 그야말로 엘리베이터를 탄 듯 승승장구했다.
중앙승가대 불교학과를 나와 동국대 대학원에서 불교사회복지학을 전공한 종원스님은 해군 해병대 법사 대위로 전역하여 백령도 흑룡사, 진해 흥국사, 서울 통해사 주지 등을 역임했다. 현재 맡고 있는 조계종 주요직 소임을 보면 스님의 종무능력을 짐작케 한다. 조계종 제18대 중앙종회의원으로 종헌개정 및 종법제개정 특위와 종교편향 불교왜곡 대응 특위 위원을 맡고 있으며, 조계종 군종특별교구 부교구장, 조계종 총무원장 군종특별보좌관, 중앙승가대 총무처장 등이다. 지난 5월 총무원장 진우스님을 예방하고 천년을세우다 종책사업에 1000만원을 쾌척했고, 이에 앞서 중앙승가대와 호국홍제사에도 2000만원의 적지 않은 금액을 희사한 바 있다.
말 한마디도 깊이 생각하고 신중하게 입을 여는 듯한 종원스님은 지난 6월27일 만난 기자에게 “사찰을 사찰답게 만들어 제역할을 잘 할 수 있도록 주지가 365일 도량에 머물면서 신도들과 소통하고 신도들에게 가장 유익한 시간을 선사하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라며 “코로나가 기승을 부렸던 힘겨운 시간들이었지만 보람있고 의미있는 시간으로 채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대각사 도량 곳곳에는 최근 종단에서 배포한 ‘부처님 법 전합시다’ 포스터가 활기를 더했고 종무실 게시판에는 다도회와 합창단, 참선반 등 각양각색의 신행활동을 소개하는 코너가 빼곡했다. 종원스님의 오랜 도반이자 인도 다람살라에서 수행한 마하스님은 총무소임을 보면서 신도들을 결집시키고 사중일을 꼼꼼하게 챙길 뿐만아니라, 혜화경찰서 경승활동에 적극 임하면서 지역포교에도 역할을 다하고 있다.
폐허나 다름없었던 대각사 옆 오동암을 말끔하게 복원한 종원스님은 “대각사는 역사적으로나 지리학적으로나 엄청난 가치를 갖고 있다”며 “사찰 외관과 울타리까지 차근차근 도량을 가꾸고 다듬어 용성조사는 물론 역대 수많은 큰스님들의 고귀한 뜻을 선양하면서 옛 명성에 어긋나지 않도록 주지로서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각사는 7월2일 10여년만에 대각사 합창단을 재창단, 문화포교의 신호탄을 날렸다.